황장엽 선생님은 2003년과 올해 두 차례 미국을 방문했다. 나는 그분 바로 옆에서 통역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황장엽이라는 한 인간에게 존경심을 갖게 됐다.

황 선생의 공식 일정은 보통 아침 7시 시작됐다. 언론 인터뷰와 미국 공직자·정치인들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팔순에 접어든 고령에다 13시간의 시차가 있었지만 그는 늘 활기찬 모습이었다. 하루 평균 7개 정도의 모임에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선생님 힘드시지 않으세요"라는 내 질문에 그는 "정신력이 있으면 되지"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은 그때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던 것 같다. 수령주의의 탄압과 굶주림에 신음하는 북한의 실상을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당시 선생이 방미 길에 오르자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의 아들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얘기가 일본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선생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북의 협박이었다.

선생은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의 안전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북한을 떠나올 때 가족들의 안위는 잊기로 했다. 내가 이 한 몸 잘살자고 북한을 떠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북한을 떠났다. 그때 나는 북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리에는 아사자들이 늘어났고, 가뭄과 흉작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김정일은 주민들의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북한 내에서 나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한은 변화가 필요했고, 그 변화는 내부에서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북한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북한을 떠나오면서 가족들은 잊었다. 내 마음의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선생의 목소리는 비장했고 통역하던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흔들렸다. 민족을 위해 자신 개인을 버린 듯한 말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통찰력과 논리가 있었다. 그의 말을 통역하는 것은 즐거웠다.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것이라고 보는가, 아니면 오로지 협상용인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독사가 독을 품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위험한 것이다. 사용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선생은 때로는 10분여 끊지 않고 말을 이어갔지만, 통역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한 공개 발표회 도중에 "탈북자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미국에 망명하셔서 망명 정부를 세우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기대, 탈북자들의 바람 등에 관한 여러 질문 후에 나온 물음이라 아마 선생도 약간 당혹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선생은 "나는 아직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한국도 역시 나의 조국이다. 미국까지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 분이 해학(諧謔)을 갖고 있었다. 나는 경직된 북한 체제 안에서 한평생 살아온 선생이 사람을 웃길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심심찮게 주변에 웃음이 나오게 할 수 있는 분이었다.

짧은 시간에 내가 그의 내면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내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제 고인이 되신 선생을 다시 뵐 길은 없으나, 민족을 위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희생하신 그의 정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한미법률사무소 임종범 변호사

출처: 조선일보 2010년10월12일 독자기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12/20101012021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