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날 부르신다. 사과를 먹으라고 하신다. 대추를 먹으라고 하신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아버진 이 아들이 보고 싶으셨나보다.


아버지 과일 드시고 나면 꼭 양치질하시라고 말씀드린다. 이빨을 오래오래 쓰시려면 잘 관리해야 한다고 이 아들 말씀드린다. 아버진 툴툴 웃으신다. 그렇게 오래까지 이빨이 필요하려나 하시며 웃으시는 듯. 물론 그렇게 소리 내 말씀은 안 하신다.


아들은 허리가 아프다. 아버지 침대를 무리해서 나르다 허리를 다쳤다. 예전에 다친 허리가 도진 것이다. 얼마나 아픈지 제대로 걷지도 서지도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선 내색을 안한다. 아버진 이 아들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신다. 눈이 많이 어두워지셨다.


아버진 하루하루 늙어가신다. 귀도 잘 안 들리시고, 눈도 침침해지신다. 아직은 대화가 가능하나, 이도 점점 힘들어진다. 아버지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사람 이름도 얼굴도 그렇게 하나하나 지워진다. 머릿속의 지우개는 지우는 기능만 있지 새로운 정보를 쓰는 기능은 없다.


아버진 새로 오신 간병인의 이름을 모르신다. 매번 물어보시지만, 곧 잊으신다. 코코넛 주스가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자주 드시게 한다. 아버진 매번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코코넛 주스라고 말씀드리면 "그래?"라고 하시며 되물으신다. 그러면 이 아들 "치매 예방에 좋데요"라며 말씀드린다. 그러면 아버진 "그럼 먹어야지" 하시며 주스를 드신다. 그러면서 다시 물으신다, 이것이 무엇이냐며. 머릿속의 지우개 성능이 너무 좋다.


아버진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물으신다. 세 시 사십 분이라고 말씀드리니, 신기한 듯 시계를 보신다. 그러시더니, 이 아들에게 가서 자라고 하신다. 밤엔 자야 한다고 하시며. 아버진 불현듯 아침에 일 가야 하는 아들이 걱정되신가보다.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이 아들 바라본다. 아버진 전자 사진 앨범을 뒤척이신다. 중지로 이리저리 퉁겨보신다. 사진이 자꾸 바뀌는 것이 신기하신 듯. 그러다 "젊었지" 하시며 소싯적 당신의 사진에 대한 사진 평을 하신다. 그러다 엄마 사진을 만난다. 한 35년 된 사진이다. "이게 누구지?" 하시며 물으신다. 엄마라고 말씀드리니, "그래?" 하시며 되물으신다.


한참 사진을 보시던 아버지에게, 이 아들 양치 꼭 하시고 주무시라고 당부한다. "그래?" 라고 하시며 아버지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신다. 허리를 펴시는 아버지가 신비롭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리에서 못 일어나시던 분이 이 새벽엔 거뜬히 일어나 걷는다. 작은 기적이다.


양치를 하시곤 다시 전기 면도기로 면도를 하신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아침에 복지관에 가려면 미리 면도를 해야 한다고 하시며 웃으신다. 그렇다, 아버진 언제나 면도를 하고, 머리를 빗고, 옷 매무세를 단정히 하고 그제서야 집 밖을 나서셨던 것이다. 멋쟁이 우리 아버지, 머릿속 지우개도 아버지의 매력을 지우진 못한다.


아버진 다시 자리에 누우신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이제 나도 멋 부리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오늘은 이래저래 할 일이 많은 하루다. 아버지 손을 꽉 잡으며 이 아들 아버지 잘 주무시라고 말한다. 오늘은 시작이 좋다. 멋진 하루가 될 것이다.


한미법률사무소 임종범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