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안 한다. 답을 찾은 것 같진 않은데, 꼭 답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냥 산다. 어렸을 때는 정말 궁금했는데, 나이가 들며 어느덧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안한다. 어른이 되면 그런 건가? 여하튼 쉰이 되니 이제서야 내가 더는 어리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공자는 마흔에 불혹이라 했는데, 난 쉰이 되고서야 불혹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흔들림은 여전하지만, 그다지 오래가지 않고, 때때로 이성이 본능을 앞서는 역전 현상도 관찰된다. 많이 인간 돼간다. 


"왜 사는가?" 대신,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그런 고창한 질문을 할 때가 된 듯도 한데, 결국은 "누구를 위해 사는가?" 하는 질문에서 막히고 만다.  


"난 누구를 위해 사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럴땐 역시 나보다 먼저 삶을 살았던 선배의 말씀이 필요하다. 진리는 내 안에 있다지만, 내 안으로 가는 길을 선배들이 더 잘 안다.  


그래서 떠오른 한 분 황장엽씨. 황선생님이 자주 하신 말씀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분 특유의 억양으로 말씀했다. 그렇다, 내 나이 쉰 살에 즈음하여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여기서 또 나이가 들면 이런 시시한 질문은 안 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쉰 살 즈음의 화두는 "난 누구를 위해 사는가?"이다.


임종범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