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앉으신 엄마는 졸음에 겨워 목을 앞으로 숙이고 잠을 주무십니다. 주위엔 텔레비전 소리, 사람 움직이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 등이 어울려 불협화음을 내는데, 주위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주무십니다. 엄마 어깨가 살짝살짝 들리는 모습을 보며 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삶과 죽음은 이렇게 한 호흡 차이이건만, 왜 그리도 엄마의 죽음이 두려웠는지. 맹인 호메로스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필멸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필멸의 운명이라면 그 또한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겠지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고 수많은 사람이 불사의 꿈을 가졌으나, 그 누구도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었지요. 모두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이겠지요.  


무릇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이는 흙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는 때가 되어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유인력이 현상을 설명한다 하지만, 떨어지는 사과의 입장에선 때가 무르익었기에 떨어질 뿐이겠지요.  


병에 걸려, 신체 일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의학적인 이유라면, 때가 되었기에 하늘로 돌아가는 것은 엄마의 운명일 것입니다. 때가 무르익었기에.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기적이라 한다면, 엄마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겠지요.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 상황에서 살아나심은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때가 언제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바랄 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를 허락하신다면, 내일 하루도 원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겠지요. 그래서 운명은 태어나며 정해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 누가 있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시 한 수 읊어봅니다.  


당나라 시인 황지환 님의 "관작루에 올라"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登鸛雀樓"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밝은 해는 서산에 걸려 다하고 

황하는 바다로 흐른다 

천리 멀리 보고 싶은 욕심에 

한 층 더 오른다 


임종범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