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 것인지 생각을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아침잠을 깼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자애로운 웃음을 짓고 계셨고 우리 아들은 잘 할 것이라며 말씀하고 계셨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려진다고 하는데, 엄마에 대한 기억은 더욱 뚜렷해져만 간다. 마치 매직잉크로 쓰여진 편지처럼. 어쩌면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진 요즘 일어로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가 일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이제까지 살았는데, 요즘 들어서야 아버지 일어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일어로 여기가 아프니 이곳에 전자패드를 붙혀라 하시며 주문도 하시고. 통증이 심한 곳을 눌러드리면 시원하다고 말씀하곤 하신다. 이렇게 일어를 잘 하시는 줄 정말 몰랐다.

아버지는 일어로 노래를 부르신다. 노랫말은 알아 듣지 못하겠으나,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도 부르셨던 그런 노래인 듯 유창하게, 오래오래 노래를 부르신다. 기분이 좋으신 듯도 하고, 그저 옛날이 생각나서 그러신 듯도 하고.

노래를 부르시다, 당신 이야기를 하신다. 어렸을 때, 국민학교를 다닐 때 일본인 교장에게 혼 난 이야기도 하시고, 내가 몰랐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도 하신다.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 안 나시던 아버지는 당신 소싯적 일을 하나 둘 씩 그렇게 쉽게 쉽게 기억상자에서 꺼내 놓으신다. 그렇게 이야기 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나는 행운아다. 어릴 적 기억을 하나 하나 찾아 가시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나는 좋다.

물론 한켠에선 마음이 아려온다. 마치 선착장에서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듯. 그 배를 향해 하릴없이 손을 뻗쳐보지만 내 손엔 허공만 느껴질 뿐, 그 배는 예정대로 떠난다.

삼차원의 세계에선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한다. 나는 현재에 살고 있을 뿐이지만,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일 텐데... 나는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미래를 본다. 나는 다만 그렇게 멀어지는 배를 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 뿐이다.

사람이 나이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의식이 단순해진다는 말이라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 나이를 뜻한다면 이는 분명 틀린 말이다. 생로병사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태어나서 나이가 들면, 병 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다시 어린아이가 돼서 어른으로 자랄 수는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많다. 인생을 살아오며 겪게 되는 이런저런 감정에 대해 현대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다. 고서를 보면 옛날엔 삶과 죽음에 대해 가르쳤던 것 같은데, 현대 학교에선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삶에서 배워나가야 하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가르켜 줄 수 없는 것들. 그래도 교양 과목으로나마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새삼 생각한다.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 아침, 눈을 감으면 엄마가 떠오르고, 눈을 뜨면 아버지가 걱정된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데, 발만 동동 구른다고, 아버지 삶의 남은 날을 하루라도 연장할 수 있으려나? 연장한 들 어떤 의미가 있으려나? 촛불은 꺼지기 전에 그 심지가 환하게 타오른다고 한다. 아버지는 70여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당신 삶을 정리하고 계실까?

아버진 이제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씀하신다. 아들이 혹시나 아버지 목소리에 놀랄까 걱정하시는 듯, 화내시지도 짜증내시지도 않는다. 그렇게 아버지는 옛날 이야기를 하시며 내일로 떠나신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엉킨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유창한 일어로 말씀하고 계신다.

임종범 2017년9월24일